산상수훈(4) 애통의 끝자락에서

by 강석진 posted Aug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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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4) 애통의 끝자락에서 
마태복음 5장 4절, 6장 14-15절
2025년 8월 24일
결단: 심령이 가난한 자(팔복)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애통입니다. 
애통은,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으로 그 감정의 깊이와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장 큰 슬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지를 떠나 산에 올라온 자들이 자신들이 제대로 들었을까?, 귀를 의심케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은 놀라운 것입니다. 
누구도 애통을 복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고통을 불행이라 말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팔복을 시작하자 마자 애써 피하고 싶었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고통의 이야기를 꺼내고 계실까요?
산상수훈은 우리 삶의 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본질을 깊이 파고 드십니다. 그래서, '돌직구'를 날립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왜곡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첫째, 고통은 인지의 왜곡을 일으킵니다.
너무 큰 아픔을 겪게 되면, “다 끝났다”, “나는 버림받았다”라는 결론에 빠집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고통은 관계의 왜곡을 가져옵니다.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작은 말이나 행동에도 예민하고 반응하고 경계하고 거리를 둡니다.
"당신이 내 고통을 어떻게 알아?" 거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원망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구분할 것이 있습니다. 애통과 원통입니다. (애통 vs 원통)

원통이란, 분하고 억울한 감정입니다.
자신의 고통의 책임이 다른 사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원망의 태도는 잠깐은 아픔을 달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이나 치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고통을 원통으로 경험하면서 살게 된다면 그것만큼 아픈 일은 없습니다. 
원통에는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으로 아파하는 것을 무척이나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아파할 것에 대해서만 아파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팔복의 두번째 복은,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레슨입니다. 
고통을 원통으로 겪지 말고 애통으로 겪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아픔이 얼마나 큰가, 그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아픔을 대해서 얼마나 건강한 태도로 맞서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은, 
(1) 자신의 죄에 대해서 이러저런 핑계되지 않고 
주님 앞에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2) 세상의 죄와 불의을 보면서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바라보시고 아파 하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이 땅의 공의로운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애통입니다.

(3) 또한,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난을 보며 그 아픔에 공감하면서 
그가 그 이상으로 더 아파하지 않길 바라며 돕고자 하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이런 애통의 마음이 필요한 것은, 그래야 나의 아픔에만 매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의 복이란, 자신의 고통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원통에서 빠져 나와 애통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나의 아픔만 보던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는 세상으로 우리 마음이 옮겨갈 때 애통의 축복이 일어납니다. 

애통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위로는 강력한 위로의 힘이 있습니다.

함께 교제하고 뜰모임을 나눌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통의 영성입니다. 
서로를 원통이 아닌, 애통의 마음으로 보십시다.
나의 아픔에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단계로, 
더 나아가 타인의 아픔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는 단계로 점점 성장할 때 그때 애통은 복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애통"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 라"(:15)

주기도문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용서입니다. 
12절에서는 "우리 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말씀을 통해서 
용서는 너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원통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통으로는 용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원통은 좀과 동록처럼 우리를 점점 갉아먹지만, 애통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원통은 더 큰 상처를 낳지만, 애통은 용서와 회복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 에게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내 아픔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아픔을 함께 느끼십시오.
억울함 속에 갇히지 않고, 애통의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회복, 용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원통의 세상에서 구원받고 이제 애통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위로가 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는 복있는 자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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