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한국어


산상수훈(10)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자 

마태복음 5장 10-12절, 7장 13-14절
2025년 10월 12일 
결단: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기쁨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얻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입니다. 
괴롭게 신앙생활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십시오.

둘째, 책임감입니다.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쾌락입니다. 신앙의 기쁨에는 영혼 구원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책임을 갖게 됩니다. 성도로서 영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소속되고, 뜰모임에 참여하며, 사역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앙의 유익만 누리고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말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기적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책임지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책임지지 않으십니다.

셋째, 어려움과 박해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 화평을 위해 수고해도 결과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상황이 악화되고, 악의적 대우나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것이 박해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하셨습니다. 
뜻밖에도 팔복의 마지막에는 ‘박해’가 있습니다. 
주님은 더 나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2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박해가 존재한다는 현실 인식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박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도 박해는 있습니다. 
세상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박해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과거 심각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박해를 잊고, 이제는 사라졌다고 착각합니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박해는 없지만, 여전히 여러 형태의 박해가 존재합니다.

첫째, 영적인 박해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불편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기에 늘 갈등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 할수록 세상은 더 불편해집니다.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괴롭습니다. 이런 불편함은 영적 박해입니다.

둘째, 시대적 박해가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물리적인 박해는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은 허다합니다.
결혼 후 신앙생활을 지속하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합니다.
차별금지법과 사학법은 신앙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예배를 막는 것은, 의대에서 의학을 금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이단도 교원이 될 수 있는 현실은 명백한 박해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무슨 박해냐?”고 말할 수 있지만, 
교회는 어떤 시대에도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공산주의 체제뿐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예수만이 길이다”라는 고백은 편협하다고 조롱받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을 지키면 다양성에 어긋난다며 공격받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화적 박해입니다. 
더 이상 감옥과 채찍의 형태로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조롱과 무시, 왜곡된 프레임, 그리고 신앙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문화적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박해의 형태는 변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믿음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인한 박해는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서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편에 선 자들을 두려워하기에 박해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박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임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오히려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는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으로 대응하십시오.
계시록은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소망하라고 격려합니다. 
박해는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냅니다. 스데반은 그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순교했지만,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박해를 받을 때 중요한 것은 나의 신앙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바울의 회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고난이 누군가의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엄격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박해하기 전에, 먼저 나태함을 박해하십시오. 
바울은 자신에게 엄격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방해되는 것은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박해의 삶”입니다. 
편안함을 거부하고, 세속적 성공과 자기중심적 신앙을 버리는 삶입니다.

물리적 박해가 사라진 시대에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 
박해가 사라지며 순교적 신앙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발적인 박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박해하십시오.
말씀보다 세상의 소리를 따르려는 연약함을 박해하십시오.
자기연민과 변명하려는 마음을 박해하십시오.

박해가 사라졌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 엄격해지십시오.
자발적인 박해의 삶을 살아가며, 
좁은 길을 걸어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2 산상수훈(11)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자2 김준영 2025.10.19 91
» 산상수훈(10)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자 강석진 2025.10.12 142
140 산상수훈(9) 화평을 만드는 사람 file 송수영 2025.10.06 176
139 산상수훈(8): 마음이 청결한 자 이상원 2025.09.28 178
138 산상수훈(7) 받을 상이 있는 복: 긍휼 강석진 2025.09.21 185
137 산상수훈(6)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복 김준영 2025.09.14 174
136 산상수훈(5) 온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송수영 2025.09.08 188
135 3세대가 하나되는 교회 이상원 2025.08.31 195
134 산상수훈(4) 애통의 끝자락에서 강석진 2025.08.24 226
133 산상수훈(3) 마음이 천국이 되다 김준영 2025.08.17 229
132 산상수훈(2)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다 송수영 2025.08.10 207
131 산상수훈(1) 예수님과 함께 산을 오르다. 이상원 2025.08.03 249
130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강석진 2025.08.03 182
129 경건한 사명자(23) 일상은 동행입니다. 김준영 2025.07.20 199
128 경건한 사명자(22) 일상은 훈련입니다 송수영 2025.07.13 208
127 경건한 사명자(21) 일상은 선물입니다. 이상원 2025.07.06 221
126 경건한 사명자(20) 우리는 한 몸 강석진 2025.06.29 205
125 경건한 사명자(19) 장성한 생각을 위한 훈련 송수영 2025.06.23 213
124 경건한 사명자(18)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새롭게 됩니다. 김준영 2025.06.15 223
123 경건한 사명자(17) 오염된 생각의 위험 강석진 2025.06.08 24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